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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키어사지 (CV-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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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USS 키어사지 (CV-33)는 에식스급 항공모함으로, 1946년 취역하여 1970년 퇴역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동해안 및 카리브해 훈련, 사관생도 훈련 순항에 참여했으며, 1948년에는 지중해에서 제6함대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북한군을 상대로 6,000회 출격했으며, 이후 극동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타이완 해협 감시 및 다천 군도 민간인 구조를 지원했다. SCB-125 현대화 개장을 거쳐 대잠 항공모함으로 변경되었고, 1960년대에는 소련 선원 구조, 라오스 정세 안정, 머큐리 계획 지원, 베트남 전쟁 참전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퇴역 후 스크랩으로 매각되었으며, 한국 전쟁 2개, 베트남 전쟁 5개의 종군 성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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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키어사지 (CV-33) - [배(Ship)]에 관한 문서
함선 정보
함명키어사지
다른 함선USS 키어사지
함명 유래키어사지
별칭마이티 케이 (Mighty Kay), 크래시버지 (Krashbarge)
함 경력
국가미국
건조뉴욕 해군 조선소
기공1944년 3월 1일
진수1945년 5월 5일
취역1946년 3월 2일
퇴역1950년 6월 16일
재취역1952년 2월 15일
최종 퇴역1970년 2월 13일
재분류CVA-33, 1952년 2월 15일
CVS-33, 1958년 10월 1일
운명폐기, 1974년 2월
함 특징
함 종류에식스급 항공모함
기준 배수량(표준)
동력보일러 8개
추진증기 터빈 4개
축 4개
승무원장교 및 사병 3448명
무장5인치 (127 mm)/38 구경장 함포 12문
보포스 40 mm 32문
엘리콘 20 mm 기관포 46문
장갑벨트:
격납고 갑판:
갑판:
지휘탑: 1.5인치
항공기90–100대
추가 정보
USS 키어사지
1966년 해상에서 항해 중인 USS 키어사지
USS 키어사지
SCB-125 개장 후 (1963년 촬영)

2. 역사

1952년 2월 15일 재취역한 키어사지는 한국 전쟁 참전을 위해 8월 11일 샌디에고를 출항, 하와이 제도에서 훈련을 거쳐 9월 8일 일본 요코스카에 도착했다. 6일 뒤 제77기동부대(TF 77)에 합류하여 약 5개월간 북한을 상대로 6,000회에 달하는 출격 임무를 수행했다. 1953년 2월 말 한국에서의 임무를 종료하고 3월 17일 모항인 샌디에고로 복귀했다. 한국 전쟁 참전 중 함선 분류 기호가 CV-33에서 '''CVA-33'''(공격 항공모함)으로 변경되었다.

2. 1. 건조 및 취역

취역 직후인 1946년 4월 13일 정박 중인 키어사지


키어사지는 "장-선체" 에식스급 항공모함 중 하나로 건조되었다. 원래 선체 번호 CV-12는 '키어사지'로 명명될 예정이었으나, 1942년 10월 산타크루즈 제도 해전에서 침몰한 호넷(CV-8)을 기리기 위해 CV-12가 호넷으로 개명되었다. 이후 새로운 선체인 CV-33이 '키어사지'라는 이름을 이어받았다.

키어사지(CV-33)는 1944년 3월 1일 뉴욕 해군 조선소에서 기공되었고, 1945년 5월 5일 진수되었다. 진수식에서는 해군 작전 부참모장인 오브리 W. 피치 제독의 부인 그윈네스 피치 여사가 후원자로 나섰다. 함선은 1946년 3월 2일, 초대 함장 프랜시스 J. 맥케나 대령의 지휘 아래 정식으로 취역했다[7]. 맥케나 대령은 호위 항공모함 세인트 로(St. Lo)의 함장으로 취역부터 침몰까지 전투를 지휘했으며, 이 공로로 해군 십자 훈장을 수훈한 인물이다.

취역 후 키어사지는 1946년 4월 21일 모항인 버지니아주 노퍽에 도착하여, 이듬해까지 동해안카리브해를 따라 훈련을 실시했다. 1947년 6월에는 해군 사관학교 생도들의 훈련 항해를 위해 노퍽을 출항하여 영국으로 향했다. 같은 해 8월 미국으로 복귀한 후 약 10개월간 훈련에 참여했으며, 1948년 6월 1일 햄프턴 로드를 떠나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미국 제6함대에 합류했다. 이 기간 동안 제6함대는 중동 지역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한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키어사지는 1948년 10월 2일 로드아일랜드주 퀀셋 포인트로 돌아왔고, 1950년 1월 27일까지 대서양 연안과 카리브해에서 작전 활동을 계속했다[7].

2. 2. 초기 활동 (1940년대)



USS 키어사지(CV-33)는 1946년 3월 2일, 초대 함장 프랜시스 J. 맥케나 대령의 지휘 아래 취역했다.[7] 매케나 대령은 호위 항공모함 세인트 로(USS St. Lo, CVE-63)의 함장으로 취역부터 침몰까지 전투를 지휘했으며, 이 공로로 해군 십자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취역 후 키어사지는 1946년 4월 21일 모항인 버지니아주 노퍽에 도착하여, 이듬해까지 동해안카리브해에서 훈련 작전을 수행했다. 1947년 6월 7일에는 노퍽을 떠나 영국으로 향하는 사관생도 훈련 순항에 나섰다.

1947년 8월 미국으로 돌아온 키어사지는 약 10개월간 기동 훈련을 계속했다. 1948년 6월 1일, 햄프턴 로드를 출항하여 제6함대에 배속되어 지중해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이 항해 직전인 5월 31일에는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는데, 햄프턴 로드의 거친 파도 속에서 약 90명의 병력을 육상 휴가에서 항공모함으로 복귀시키던 약 15.24m 길이의 보트가 침몰하여 해군 18명과 해병대 10명이 실종되었다. 68명은 구조되었다.[1] 지중해 임무 기간 동안 제6함대는 중동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키어사지는 1948년 10월 2일 로드아일랜드주 퀜셋 포인트로 복귀했으며, 이후 1950년 1월 27일까지 대서양 연안과 카리브해에서 작전 활동을 이어갔다.[7]

2. 3. 한국 전쟁 (1950년대)

SCB-27A 개장 후(1952년 9월 10일 촬영)


"키어사지"는 제트기 운용 능력을 갖추기 위한 SCB-27A 현대화 개장 대상으로 선정되어, 1950년 2월 23일 퓨젯 사운드 해군 공창에 입고되었고 6월 16일에 개장 공사가 시작되었다.[7] 이 개장은 당초 다른 함선들에 먼저 적용되었으나, 비용 절감을 위해 현역 함선인 "키어사지"가 선정되었다. 그러나 개장 시작 직후인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현역 항공모함의 긴급 파견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후 SCB-27 개장은 예비역 함선 위주로 진행되었다.[8] 결과적으로 "키어사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완성된 에식스급 항공모함 중 유일하게 SCB-27 개장을 받은 함선이 되었다.

1952년 2월 15일, 루이스 B. 프렌치 함장의 지휘 아래 "키어사지"는 재취역했다.[7] 훈련을 마친 후 8월 11일 샌디에이고를 떠나 하와이 제도에서 집중적인 비행 훈련을 실시했다. 한국 전쟁 참전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9월 8일 일본 요코스카에 도착했으며, 6일 뒤인 9월 14일 한반도 동해안에서 작전 중이던 제77기동부대(TF 77)에 합류했다.[7] 이후 5개월 동안 "키어사지"의 함재기들은 북한의 공산군을 상대로 약 6,000회 출격하여 적의 거점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1953년 2월 말 한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3월 17일 모항인 샌디에이고로 귀환했다. 한국 전쟁 참전 중 함종 분류 기호가 CV-33에서 '''CVA-33'''(공격 항공모함)으로 변경되었다.[7]

1953년 SCB-27A 현대화 이후의 키어사지


1953년 7월 1일, "키어사지"는 다시 극동으로 출항하여 미국 제7함대의 일원으로 불안정한 휴전 상태를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공산주의 세력의 타이완 공격 가능성에 대비하여 타이완 해협을 순찰하며 중화민국 방위를 지원했다. 1954년 1월 18일 샌디에이고로 돌아와 캘리포니아 해역에서 훈련을 재개했다.[7]

1954년 10월 7일, 세 번째 극동 배치에 나섰다. 미국 제7함대와 함께 작전하던 중, 다천 군도 철수 작전에 투입되어 중화민국 군인과 민간인의 철수를 지원했다. 1955년 2월 6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된 이 작전을 통해 민간인 18,000명과 군 병력 20,000명이 성공적으로 섬을 빠져나왔다.[7] "키어사지"는 1955년 5월 12일 샌디에이고로 귀환했으며, 이후 3년간 극동 배치와 캘리포니아 해상 훈련을 번갈아 수행했다.

1956년부터 1957년까지 "키어사지"는 SCB-125 현대화 개수를 통해 허리케인 선수(hurricane bow)와 앵글드 데크를 장착하여 함의 외형이 크게 변화했다.

1958년 여름, 대잠수함전 능력을 강화하여 대잠 항공모함으로 함종이 변경되었고, 분류 기호는 '''CVS-33'''이 되었다. 새로운 임무에 대한 집중 훈련 후, 1959년 9월 5일 다시 극동 지역으로 파견되어 미국 제7함대 작전에 합류했다. 이 항해 초기에 일본이 이세만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자, "키어사지"는 구호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함재기를 이용해 의료진과 구호 물품을 수송했으며, 승무원들은 의류와 성금을 기부하여 피해 주민들을 도왔다.[7]

2. 4. 우주 개발 지원 (1960년대)

머큐리-아틀라스 9호 회수 임무 수행 (1963년 5월 15일)


수리와 훈련을 마친 후, ''키어사지''는 1962년 8월 1일 롱비치를 출항하여 머큐리 계획의 일환으로 우주 비행사 월터 시라의 우주 캡슐 회수 임무를 맡았다. 10월 3일, 성공적인 우주 비행 후 스플래시다운한 시라와 그의 캡슐 ''시그마 7''을 태평양 해상에서 회수했다. 이후 ''키어사지''는 시라와 캡슐을 호놀룰루로 이송하여 본토 귀환을 도왔다.[7]

''키어사지''는 6개월간 훈련을 재개한 뒤, 1963년 4월 29일 진주만에 도착하여 다시 한번 우주 프로그램 지원 임무에 투입되었다. 5월 16일, 지구 궤도를 22바퀴 비행한 우주 비행사 고든 쿠퍼와 그의 캡슐 ''페이스 7''을 성공적으로 회수하여 진주만으로 이송했다.[7]

2. 5. 베트남 전쟁 (1960년대)

1969년 ''키어사지''에 탑재된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A-4G 스카이호크


1964년 6월 19일, 대잠 항공모함으로서 9번째 극동 항해에 나섰다. 7월 30일 요코스카에 도착했으며, 1964년 8월 초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자 남중국해로 파견되었다. 미 해군 항공기가 북베트남의 유류 및 보급 창고를 공격하는 동안, ''키어사지''는 제7함대에 대잠 방어 임무를 제공했다.[7] ''키어사지''는 12월 16일 롱비치로 귀환했다.

1965년 상반기에는 정비를 받았고, 이후 서해안에서 활동했다.

1966년 6월 9일 다시 극동으로 출발했다. 하와이와 일본을 거쳐 8월 8일 '양키 스테이션'에 도착하여 10월 24일까지 베트남 해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다음 날인 10월 25일 쿠알라룸푸르 지역으로 이동하여 30일 말라카 해협에 정박했다. 이후 수빅 만을 경유하여 11월 5일 '양키 스테이션'으로 복귀하여 23일까지 작전을 이어갔다. 다음 날, 홍콩 및 일본을 경유하여 귀국길에 올라 12월 20일 샌디에이고에 도착했다.[7]

2. 6. 퇴역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걸친 미국 해군의 해군력 감축 정책에 따라, 키어사지는 1970년 2월 13일에 퇴역하였다. 퇴역 후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3년간 보관되었다. 이후 1973년 5월 해군 선박 등록부에서 제적되었으며, 1974년 2월 고철로 매각 처리되었다.

3. 수상 내역

해군 공로 부대 표창중국 봉사 훈장
(연장)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훈장
해군 점령 봉사 훈장
(유럽 버클 포함)
국가 방위 복무 훈장
(2회)
한국 봉사 훈장
(2개의 전투 별)
무장 부대 원정 훈장
(3회)
베트남 봉사 훈장
(전투 별 5개)
남베트남 용감 무공 십자장
유엔 한국 훈장베트남 공화국 캠페인 훈장대한민국 참전 용사 훈장
(소급 적용)



"키어사지"는 한국 전쟁의 전공으로 2개의, 베트남 전쟁의 전공으로 5개의 종군 성장을 수여받았다.[10] 함명은 와스프급 강습상륙함의 3번함에 이어졌다.

참조

[1] 뉴스 Night Tragedy Takes 28 Lives San Bernardino Daily Sun 1948-06-02
[2] 웹사이트 USS Kearsage Rescues Soviet Soldiers, 1960 https://www.history.[...] History.navy.mil 2012-08-13
[3] 뉴스 Russians Thank U.S. Sailors https://www.nytimes.[...] 1960-03-15
[4] 뉴스 USS Kearsarge Rescues Four Russian https://www.newspape[...] The Honolulu Advertiser
[5] 뉴스 Kearsarge Rescues Russians https://www.newspape[...] Honolulu Star-Bulletin
[6] 웹사이트 Ship Nicknames http://www.zuzuray.c[...] 2019-11-04
[7] 간행물 DANFS 2018
[8] 서적 Friedman 1983
[9] 서적 世にも恐ろしい船の話 光人社 2010
[10] 웹사이트 NavSource Online:Aircraft Carrier Photo Archive USS KEARSARGE(CV-33)(later CVA-33 and CVS-33) https://www.nav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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